14개 항목
컴퓨터 사진첩을 정리하다가 오래된 사진 하나가 눈에 들어왔어요. 소곱창낙지볶음. 2015년쯤, 아마 가을이었을 거예요. 정확한 날짜는 기억이 안 나는데 사진 파일 날짜를 보니 그쯤이더라고요. 빨간 양념에 낙지랑 소곱창이 뒤엉켜 있는 사진인데, 보자마자 그날의 그 맛이 입안에서 확 살아났어요. 떡볶이나 치킨은 한국 여행하면 대부분 한 번쯤 먹어보잖아요. 근데 한국의 매운 음식 중에는 소곱창낙지볶음처럼 여행 중에 접할 기회가 많지 않은 것도 있거든요. 어릴 때부터 한국에서 먹고 자란 나한테도 자주 먹는 음식은 아닌데, 한번 먹으면 한동안 계속 생각나는 그런 부류. 그래서 사진을 좀 꺼내봤어요.

메인이 나오기 전에 반찬부터 세팅이 됐어요. 테이블 위에 접시가 대여섯 개 깔리는데, 하나하나 뜯어보면 꽤 재밌는 것들이 있어요. 접시 아래에 "동서네 낙지"라고 적혀 있는 게 이날 대전에서 갔던 가게 이름인데, 이 지점은 지금은 문을 닫았어요. 근데 이 음식 얘기는 한번 해두고 싶었어요.

연두부부터. 일반 두부보다 훨씬 부드러운 종류의 두부인데, 위에 파채랑 양념이 올라가 있고 접시에 간장 베이스 소스가 자작하게 깔려 있어요. 숟가락으로 떠먹으면 거의 푸딩처럼 흐물흐물한데, 나중에 매운 낙지볶음 먹다가 입안을 식혀주는 역할을 하더라고요.

샐러드도 나왔어요. 적양배추, 당근, 파프리카에 쌈채소가 올라간 구성인데, 드레싱이 따로 없어서 그냥 먹었더니 좀 밋밋한 편. 이건 솔직히 없어도 됐을 것 같아요.

이건 무를 얇게 슬라이스해서 식초에 새콤하게 무친 반찬이에요. 초무침이라고 하는데, 반투명하게 비칠 정도로 얇게 썰려 있어요. 한 입 먹으면 식초의 새콤한 맛이 먼저 오고 무 특유의 시원한 맛이 뒤따라오는데, 매운 음식 먹을 때 이런 게 옆에 있으면 확실히 달라요.

가운데 검은 그릇에 담긴 건 동치미. 무를 소금물에 담가 발효시킨 물김치인데, 국물이 맑고 차가워요. 안에 무가 막대 모양으로 길게 잘려서 들어가 있는 거예요. 소곱창낙지볶음처럼 매운 볶음 요리에는 이런 차가운 국물 반찬이 거의 세트로 따라오는데, 매운 걸 먹다가 이 국물을 한 모금 마시면 입안이 싹 정리됩니다.

번데기. 이건 호불호가 극단적으로 갈려요. 누에의 번데기를 삶아서 양념한 건데, 보기만 해도 못 먹겠다는 사람이 많아요. 근데 한국에서는 길거리 간식으로도 팔 정도로 오래된 음식이에요. 맛은 고소하면서 약간 흙 냄새 같은 특유의 풍미가 있는데, 나는 어릴 때부터 먹어서 거부감이 없거든요. 같이 간 엄마는 젓가락도 안 대시더라고요.

물만두까지 반찬으로 나왔어요. 만두피가 꽤 얇아서 안에 들어 있는 소가 비쳐 보일 정도였는데, 위에 깨가 솔솔 뿌려져 있고 옆에 간장 소스가 같이 나와요. 메인 나오기 전에 이것저것 집어먹고 있으니까 엄마가 "반찬만 먹다 배부르겠다" 하셨는데, 진짜 그럴 뻔했어요.

드디어 메인. 소곱창낙지볶음, 줄여서 낙지곱창이라고도 부르는 음식인데, 낙지라는 작은 문어의 일종과 소곱창을 매콤한 고추장 양념에 함께 볶아낸 거예요. 돌판 위에 빨갛게 볶아진 재료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고, 그 위에 김가루랑 깨가 잔뜩 뿌려져 있어요. 가운데 하얗게 올라가 있는 건 가래떡인데, 뜨거운 돌판 열기에 천천히 익으면서 말랑해져요. 나오자마자 냄새가 확 퍼지는데, 돌판이라 계속 지글지글 끓고 있어서 가만히 놔두면 바닥이 눌어붙어요. 빨리 안 먹으면 타는 음식이라 사진도 대충 찍고 바로 젓가락부터 들었습니다.
소곱창낙지볶음 가격 참고
가격은 가게마다 다르지만 요즘 기준으로 2인분에 3만 원~5만 원 사이가 일반적이에요. 양이 꽤 많아서 둘이 먹고도 남는 경우가 많고, 볶음밥 추가 시 2,000~3,000원 정도 더 붙습니다.



옆에서 보면 양이 어느 정도인지 감이 와요. 돌판 위로 볶음이 봉긋하게 솟아올라 있는데, 가까이 들여다보면 위에 올라간 하얀 막대기가 가래떡이에요. 쌀로 만든 길쭉한 떡인데, 양념이 부글부글 끓는 속에 밀어 넣으면 떡이 양념을 쭉쭉 빨아들이면서 쫀득해져요. 김가루랑 통깨가 표면을 덮고 있어서 멀리서 보면 그냥 빨간 덩어리인데, 바짝 붙어서 보면 초록이랑 하양이 섞여서 은근 화려하더라고요. 양념 사이사이로 낙지 다리가 말려 있는 게 보이고, 노란 건 콩나물 머리 부분. 사진으로는 전달이 안 되는데, 이 앞에 앉아 있으면 매콤한 고추장 양념 냄새가 코끝을 계속 찔러요.


김가루를 걷어내고 안쪽을 들여다봤어요. 낙지 다리에 빨판이 동그랗게 붙어 있는 게 선명하고, 그 사이에 두툼한 소곱창 조각이 양념에 번들번들하게 코팅돼 있어요. 소곱창이라는 게 소의 작은창자를 뜻하는 건데, 겉은 쫄깃하고 안쪽에 기름이 있어서 씹으면 고소한 육즙이 터져요. 매콤한 양념이랑 만나면 느끼한 게 아니라 오히려 감칠맛이 배로 올라오더라고요. 바닥 쪽에는 콩나물이 수북하게 깔려 있는데, 콩나물이 없으면 기름기가 잡히질 않아서 몇 젓가락 못 가요. 아삭한 콩나물이랑 같이 먹어야 계속 손이 가는 구조인 거예요. 한 젓가락 집으면 낙지 다리, 곱창 한 점, 콩나물 몇 가닥이 양념과 함께 한꺼번에 올라오는데, 이게 낙지곱창 먹는 맛이에요. 밥 위에 탁 올려서 같이 먹으면 밥이 순삭됩니다. 이날도 공기밥을 두 그릇이나 시켰는데 모자랄 뻔했어요.

좀 더 섞이고 나니까 양념이 골고루 배기 시작했어요.
위에 덮고 있던 김가루가 사라지니까 재료 하나하나가 다 드러나더라고요. 가운데 보이는 갈색 덩어리가 소곱창인데, 잘 보면 단면이 잘려서 속이 보이는 게 있어요. 겉면은 양념에 졸여져서 약간 쫀득하게 변했고, 콩나물은 숨이 죽으면서 양념국물을 머금은 상태. 처음 나왔을 때는 산처럼 쌓여 있었는데 섞고 나면 양이 확 줄어든 것처럼 느껴져요. 돌판 가장자리 쪽으로 양념이 보글보글 끓고 있는 게 보이는데, 여기에 닿은 콩나물이나 곱창은 살짝 눌어붙으면서 바삭한 식감이 생겨요. 일부러 가장자리 쪽에 눌어붙은 건더기를 긁어서 먹는 맛이 또 있는데, 엄마는 이걸 모르고 가운데만 퍼가시길래 한 젓가락 드려봤더니 그 뒤로 거기만 노리시더라고요.

한참 먹다 보니까 돌판 바닥에 양념 국물이 자글자글 고이기 시작했어요. 처음엔 거의 볶음에 가까웠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재료에서 수분이 빠지고 양념이 풀어지면서 자작한 국물이 생겨요. 이 국물이 또 기가 막혀요. 낙지랑 곱창에서 나온 감칠맛이 고추장 양념이랑 섞이면서 걸쭉하고 얼큰해지는데, 숟가락으로 한 번 떠서 밥 위에 끼얹으면 그냥 밥도둑이 따로 없어요. 콩나물이 이 국물을 잔뜩 머금고 있어서 콩나물만 건져 먹어도 맛있고, 가래떡은 이쯤 되면 완전히 물렁해져서 양념이 쏙 밴 상태라 한 입 베어 물면 쫀득하면서 매콤한 맛이 동시에 터져요. 오른쪽에 접시에 따로 덜어놓은 게 보이는데, 볶음을 접시에 덜어서 밥이랑 비벼 먹는 것도 이 음식 먹는 방법 중 하나예요. 돌판에서 바로 먹으면 뜨거워서 입천장을 데이기 딱 좋아요. 나는 성격이 급해서 그냥 돌판에서 바로 집어먹다가 매번 데이는데, 이날도 어김없이 혀를 한 번 델었습니다.

건더기를 거의 건져 먹고 나면 돌판에 빨간 양념 국물만 남아요. 근데 이걸 그냥 버리지 않아요. 직원분이 오더니 이 국물에 밥을 넣고 볶기 시작하는데, 국자로 쓱쓱 저으면서 밥알에 양념을 입히는 거예요. 소곱창낙지볶음은 여기서 끝이 아닌 거죠. 낙지랑 곱창의 감칠맛이 전부 녹아든 국물을 그대로 활용해서 볶음밥으로 이어지는 구조.

이걸 한국에서는 볶음밥이라고 하는데, 남은 양념에 밥을 넣고 돌판 위에서 볶아낸 거예요. 위에 김가루가 시커멓게 덮여 있고 부추라는 가늘고 납작한 풀잎 모양의 채소가 송송 썰려서 뿌려져 있어요. 가운데 노란 건 날달걀 노른자인데, 이걸 터뜨려서 섞으면 매콤한 볶음밥에 고소한 맛이 하나 더 얹혀져요. 밥을 그냥 볶은 게 아니라 낙지랑 소곱창을 먹고 남은 국물로 볶은 거잖아요. 그 국물에 이미 해산물 감칠맛이랑 곱창 기름의 고소함이 전부 녹아 있는 상태라, 따로 양념을 안 해도 밥알 하나하나에 맛이 배어 있는 거예요. 직원이 초반에는 볶아주는데 중간부터는 알아서 해야 돼요. 여기서 선택이 갈리는 게, 부드럽게 살살 볶을 건지 아니면 좀 눌리더라도 바싹 익힐 건지인데, 나는 바닥에 밥이 눌어붙으면서 누룽지처럼 바삭해지는 쪽이 좋아요. 엄마는 볶음밥이 나오자마자 "아까 밥 좀 아껴 먹을 걸" 하시더라고요. 이미 공기밥 두 그릇을 비운 뒤라 배가 터질 것 같으면서도 숟가락이 멈추질 않는 거예요. 소곱창낙지볶음이라는 음식이 볶음 하나로 끝나는 게 아니라 볶음밥까지 이어지는 코스라는 걸 이날 처음 알았어요.
볶음밥까지 싹싹 긁어 먹고 나니까 둘 다 말이 없었어요. 배가 너무 불러서. 엄마는 식혜를 시키시더니 "이런 데는 어떻게 알고 왔냐"고 물어보셨는데, 사실 그냥 집 근처에서 검색해서 간 거였어요. 낙지볶음 전문점은 서울이든 부산이든 대전이든 큰 도시에는 대부분 있고, "낙지볶음"이나 "낙지곱창"으로 검색하면 동네 근처에서 금방 나와요. 동서네낙지도 대전 둔산동이나 익산, 광주 쪽에서 아직 영업 중이고요. 포장마차 같은 데서 파는 건 아니고 제대로 된 식당에 앉아서 먹는 음식이에요.
떡볶이나 삼겹살처럼 누구나 아는 음식은 아니지만, 한번 먹어본 사람은 다시 찾게 되는 그런 종류의 음식이에요. 집에 오는 길에 엄마가 "다음에는 아빠도 데리고 오자"고 하셨는데, 그 말이 이 음식에 대한 가장 정확한 평가인 것 같아요.